이집트 제21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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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21왕조는 람세스 3세 이후 왕권이 쇠퇴하면서 시작된 왕조로, 기원전 1069년부터 기원전 943년까지 약 130년 동안 지속되었다. 수도는 타니스에 있었지만, 하 이집트 지역을 주로 통치했으며, 테베의 아문 대사제들이 상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주요 파라오로는 스멘데스 1세, 프수센네스 1세, 시아문, 프수센네스 2세 등이 있으며, 이 중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가치를 인정받았다. 마지막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2세는 사후 사위인 셰숑크 1세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제22왕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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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3중간기
이집트 제3중간기는 신왕국 붕괴 이후 여러 왕조의 분할 통치, 내분과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이 약화된 시기로,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제25왕조가 멸망하고 고대 이집트 후기 왕조가 시작되었다. -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 이집트 제20왕조
이집트 제20왕조는 신왕국의 마지막 왕조로, 세트나크테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람세스 3세 이후 왕권이 쇠퇴하며 혼란이 야기되었고 람세스 11세 이후 스멘데스에 의해 제21왕조가 시작되며 막을 내렸다. - 기원전 10세기 이집트 - 셰숑크 1세
셰숑크 1세는 리비아계 메슈웨시 부족 출신으로 기원전 943년경 이집트 제22왕조의 파라오로 즉위하여 이집트를 재통합하고 대외 정책을 통해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으며, 아문 신관 세습 폐지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원정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기원전 10세기 이집트 - 타니스
타니스는 이집트 제20왕조 말기에 건설되어 제21왕조의 북쪽 수도가 되었고, 아문 신을 위한 대사원 건설, 왕가 묘지 조성 등 활발한 건축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프수센네스 1세 등 파라오들의 무덤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된 고대 도시이다. - 나일강 삼각주 - 헬리오폴리스 (이집트)
헬리오폴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도시로, 태양신 라 숭배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카이로 근교에 흔적만 남아있는 고대 유적지이다. - 나일강 삼각주 - 무누피아주
무누피아주는 이집트 북부 나일 강 삼각주에 위치한 농업 중심의 주로, 시빈 엘 콤을 주도로 하며 마르카즈와 낌으로 나뉜 행정 구역을 가지고 있고,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지역이다.
이집트 제21왕조 | |
---|---|
기본 정보 | |
![]() | |
국가 | 이집트 |
시대 | 이집트 제3중간기 |
존속 기간 |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943년 |
수도 | 타니스 |
공용어 | 이집트어 |
종교 | 고대 이집트 종교 |
역사 | |
이전 | 이집트 제20왕조 |
이후 | 이집트 제22왕조 |
통치 | |
정치 체제 | 절대 군주제 |
2. 역사
제20왕조 말기, 람세스 11세와 별개로 상 이집트의 테베(고대 이집트어: 네우트[3])에 있는 아문 신전을 중심으로 아문 신관단이 사실상의 독립 세력 (아문 대사제 국가)을 구축했다. 한편 하 이집트에서는 스멘데스 1세가 독자적으로 타니스시에서 해안에 이르는 삼각주 지대를 세력 하에 두었다. 스멘데스 1세는 람세스 11세 시대에 군 사령관 자리에 있었고, 람세스 11세 사후, 그의 딸을 아내로 삼아 왕위를 확립했다고 한다. 그는 페르 람세스(람세스시)를 시작으로 각지의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고, 그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새로운 수도 타니스를 대대적으로 개조하여 수도로 삼았다.
스멘데스 1세는 아문 대사제 국가에 대해서도 권위를 주장하며 제한적이지만 이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아멘엠니수의 즉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각축이 있었고, 즉위에 반대했던 많은 인물이 리비아로 추방되었다. 아멘엠니수의 치세는 짧았고, 프수센네스 1세가 즉위했다. 프수센네스 1세 시대에는 과거 아멘엠니수 즉위에 반대하여 추방된 사람들의 귀국이 허용되었고, 타니스 정부와 아문 신전 간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프수센네스 1세의 긴 치세 후, 왕자 아멘엠오페트가, 이어서 대 오소르콘이라고 불린 왕이 즉위했지만, 그들의 치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이후 즉위한 시아멘 왕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동란에 개입했을지도 모른다. 구약 성서 사무엘기에 등장하는 "이집트인", 또는 열왕기에 등장하며, 가나안인 도시 게젤을 공략하고, 지참금으로 솔로몬의 왕비가 된 이집트 공주에게 주었다는 왕은 시아멘에 해당한다고 한다.[5]
마지막 왕 프수센네스 2세의 치세에 대해서도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딸을 용병으로 이집트의 부바스티스에 정착해 있던 리비아의 유력자 셰숑크와 결혼시켰다. 이 혼인을 축으로 셰숑크[6]는 군 사령관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그 혈연을 통해 이집트의 왕위를 주장, 제22왕조를 열고, 제21왕조의 세력을 계승했다.
2. 1. 테베의 아문 대사제 국가
람세스 3세의 통치 이후, 이집트에서 왕권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21왕조의 파라오는 타니스에서 통치했지만, 그들의 활동은 주로 하 이집트에 국한되었으며, 이곳을 통제했다. 이 왕조는 정치적 수도가 타니스에 있었기 때문에 '타니스 왕조'로 묘사된다. 한편, 테베의 아문 대사제들은 명목상으로만 통치하는 것을 제외하고 중부 및 상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후대의 이집트 사제 마네토는 세벤니토스 출신으로, 이집트 왕조 역사에 대한 자신의 요약본에서 "이집트 제21왕조는 13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언급했다.[1]제21왕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료는 적고, 성립 경위도 자세하지 않다. 다만, 왕조 시작 연도를 기원전 1069년으로 두는 것은 어느 정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2] 제20왕조 말기, 제20왕조의 람세스 11세와 별개로 상 이집트의 테베 (고대 이집트어: 네우트[3])에 있는 아문 신전을 중심으로 아문 신관단이 사실상의 독립 세력 (아문 대사제 국가)을 구축했다. 그리고 하 이집트에서는 스멘데스 1세가 독자적으로 타니스시에서 해안에 이르는 삼각주 지대를 세력 하에 두었다. 스멘데스 1세는 아문 대사제 국가가 시리아로 파견한 사자 웬아멘이 기록한 보고서 'Story of Wenamun|웬아멘 이야기영어'에, 사실상 하 이집트 왕으로 등장하는 네수바네브제드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경력은 불분명하지만, 람세스 11세 시대에 군 사령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람세스 11세 사후, 그 딸을 아내로 삼아 왕위를 확립했다고 한다.
스멘데스 1세는 상 이집트의 아문 대사제 국가에 대해서도 권위를 주장하며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은 그가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건축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등으로 확인된다.
스멘데스 1세 사후, 왕위를 계승한 것은 과거 아문 대사제 헤리호르의 아들 아멘엠니수였다. 그의 즉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각축이 있었고, 즉위에 반대했던 많은 인물이 리비아로 추방되었다.
아멘엠니수의 치세는 짧았고, 다음으로 프수센네스 1세가 즉위했다. 그는 또한 아문 대사제 파네제메 1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20왕조의 람세스 11세의 딸이었다. 프수센네스 1세 시대에는 과거 아멘엠니수 즉위에 반대하여 추방된 사람들의 귀국이 허용되었고, 타니스 정부와 아문 신전 간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프수센네스 1세의 딸 이시스엠케브와 아문 대사제 멘케페르라 사이에서는 혼인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짙은 혈연관계에 의해 남북 왕가 사이에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 이 사실은 타니스에서 구래에 숭배되었던 스테크[4] (세트) 신이나, 아시아 기원의 아스타르테 여신 대신 테베의 신인 아문 신, 무트 신, 콘수 신의 신전이 세워졌다는 것 등으로도 증명된다.
2. 2.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프랑스 학자 피에르 몽테는 타니스에서 발굴을 진행하던 중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프스센네스 1세의 왕묘를 발견했다. 이 왕묘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미도굴 왕묘이다. 투탕카멘 왕묘조차 소규모로 2번의 도굴을 당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귀중한 사례이다.프스센네스 1세의 미라가 안치된 적색 화강암 석관은 왕가의 계곡에 있는 제19왕조 메르넵타의 석관을 재사용한 것이다. 또한, 그 안쪽의 흑색 화강암 석관도 소유자가 불분명하지만, 신왕국 시대 왕의 석관을 재사용한 것이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입증한다. 하나는 테베에 인접한 왕가의 계곡에서 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프스센네스 1세가 아문 대사제 국가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 또는 그에 대한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왕가의 계곡에서 "공권력"에 의한 도굴이 행해졌다는 사실이며, 그 외의 부장품에도 재사용된 물건이 포함되어 있다.
프스센네스 1세 왕묘에는 왕비 무트노지메트의 매장실도 만들어졌지만, 흥미롭게도 발견되었을 때 무트노지메트의 매장실에 잠들어 있던 것은 무트노지메트가 아니라, 그녀의 아들 아멘엠오페토였다. 또한, 몇 구의 미라가 이 왕묘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마도 붕괴 직전의 묘에 매장된 미라가 잇따라 이 왕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3. 역대 파라오
파라오 | 이미지 | 프레노멘 (왕위명) | 호루스 이름 | 재위 기간 | 매장지 | 배우자 | 설명 |
---|---|---|---|---|---|---|---|
스멘데스 1세 / 네스바네브제드 1세 | ![]() | 헤지케페레 세테펜레 | 카나크트메리레세우저 아무크페셰페르세카마트 |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1051년 | 불명 | 텐타문 | 하 이집트 통치, 제21왕조 창시자 |
아메넴니수 | ![]() | 네페르카레 헤카와세트 | (불명) | 기원전 1051년 - 기원전 1047년 | 불명 | ||
프수센네스 1세 / 호르-파세바카엔니우트 1세 | ![]() | 아케페레 세테페남문 | 카나크트메데담문 유저파우세카엠와세트 | 기원전 1047년 - 기원전 1001년 | NRT III, 타니스 | 무트네제메트, 위아이 | 재위 기간 41년 또는 46년으로 추정 |
아메네모페 | ![]() | 유저마아트레 세테페남문 | (불명) | 기원전 1001년 - 기원전 992년 | 타니스 | 마네토는 9년 통치 기록 | |
대 오소르콘 | ![]() | 아케페레 세테펜레 | (불명) | 기원전 992년 - 기원전 986년 | 불명 | 6년 통치 | |
시아문 | ![]() | 네테르케페레 세테페남문 | 카나크트메리마트 사메리예남문페렘하우에프 | 기원전 986년 - 기원전 967년 | 불명 | 19년 통치 추정 | |
프수센네스 2세 / 호르-파세바카엔니우트 2세 | ![]() | 티트케페루레 세테펜레 | (불명) | 기원전 967년 - 기원전 943년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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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멘데스 1세는 람세스 11세 사후, 그의 장례를 집전하고 고대 이집트 전통에 따라 파라오로 즉위했다.[2] 그는 페르 람세스의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새로운 수도 타니스를 건설했다.
아메넴니수는 스멘데스 1세의 친아들로 추정되며, 그의 유물은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왕명이 적힌 화살촉뿐이다.
프수센네스 1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 피네젬 1세의 아들이었다. 그는 타니스를 요새화하고 수도를 완전히 천도했다. 그의 무덤은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되었지만, 유물의 질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메네모페는 아버지 프수센네스 1세와 공동 통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무덤은 위치가 좋지 않아 후대 파라오 시아문이 그의 미라를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재매장했다.
대 오소르콘은 셰숑크 1세의 삼촌이며, 그의 존재는 카르나크 신관 연대기와 리비아 출신 왕이라는 기록으로 입증되었다.
시아문은 타니스의 아문 대신전을 확장하고, 멤피스에 아문 신전을 봉헌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파라오'라는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프수센네스 2세는 아문 대신관 직을 사임하지 않고 이집트 전체를 다스렸다. 그는 후계자가 없어 사후에 셰숑크 1세가 제22왕조를 개창한다.
3. 1. 스멘데스 1세 (기원전 1077년 ~ 기원전 1051년)
스멘데스(네스바네브제드 1세)는 기원전 1077년부터 기원전 1051년까지 하 이집트를 통치한 이집트 제21왕조의 창시자이다. 그의 프레노멘(왕위명)은 '헤지케페레 세테펜레'이며, 호루스 이름은 '카나크트메리레세우저 아무크페셰페르세카마트'이다. 배우자는 텐타문이다.[2]스멘데스는 이집트 제20왕조 말기, 람세스 11세와 별개로 상 이집트 테베의 아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아문 신관단(아문 대사제 국가)과는 별도로, 하 이집트 타니스에서 해안까지 이르는 삼각주 지대를 다스렸다. 그는 아문 대사제 국가가 시리아로 파견한 사자 웬아멘이 기록한 보고서(Story of Wenamun영어)에 사실상 하 이집트 왕으로 등장하는 네수바네브제드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스멘데스는 람세스 11세 시대에 군 사령관이었고, 람세스 11세 사후 그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를 확립했다.
스멘데스는 페르 람세스를 비롯한 각지의 오래된 건물을 해체하고, 그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새로운 수도 타니스를 대대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상 이집트의 아문 대사제 국가에 대해서도 권위를 주장하며 제한적이나마 인정받았는데, 이는 그가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건축 활동을 했다는 것 등으로 확인된다.
3. 2. 아메넴니수 (기원전 1051년 ~ 기원전 1047년)
아메넴니수는 스멘데스의 뒤를 이어 이집트 제21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1051년부터 기원전 1047년까지로 짧았다. 아메넴니수의 즉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권력 다툼이 있었고, 이에 반대했던 많은 인물들이 리비아로 추방되기도 했다.[2]
아메넴니수의 왕위명(프레노멘)은 '네페르카레 헤카와세트'였다.[2] 그의 호루스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3. 프수센네스 1세 (기원전 1047년 ~ 기원전 1001년)
왕위명은 아케페레 세테페남문, 호루스 이름은 카나크트메데담문 유저파우세카엠와세트이다. 기원전 1047년부터 기원전 1001년까지 재위했으며, 정확한 재위 기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41년 또는 46년으로 추정된다. 타니스의 NRT III에 매장되었으며, 배우자는 무트네제메트와 위아이였다.
프수센네스 1세 시대에는 과거 아멘엠니수 즉위에 반대하여 추방된 사람들의 귀국이 허용되었고, 타니스 정부와 아문 신전 간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졌다. 프수센네스 1세의 딸 이시스엠케브와 아문 대사제 멘케페르라의 혼인으로 남북 왕가 사이에 협력 관계가 구축되었다. 이는 타니스에서 고대부터 숭배되었던 스테크[4]나 아시아 기원의 아스타르테 여신 대신 테베의 신인 아문, 무트, 콘수 신의 신전이 세워졌다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프랑스 학자 피에르 몽테는 프수센네스 1세의 왕묘를 발견했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미도굴 왕묘이다. 투탕카멘 왕묘조차 소규모로 2번의 도굴을 당했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사례이다.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가 안치된 적색 화강암 석관은 왕가의 계곡에 있는 제19왕조 메르넵타의 석관을 재사용한 것이다. 안쪽의 흑색 화강암 석관도 소유자가 불분명하지만, 신왕국 시대 왕의 석관을 재사용한 것이다. 이는 프수센네스 1세가 아문 대사제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왕가의 계곡에서 "공권력"에 의한 도굴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수센네스 1세 왕묘에는 왕비 무트노지메트의 매장실도 있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무트노지메트가 아니라 그녀의 아들 아멘엠오페토가 안치되어 있었다. 붕괴 직전의 묘에 매장된 미라가 잇따라 이 왕묘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몇 구의 미라도 발견되었다.
마네토의 기록에 따르면 프수센네스 1세는 46년간 재위했다. 동시대 사료 등에서 복원된 왕명은 "아아케펠라=세테프엔아멘·파세바카엠니우트 1세"이며, 재위 연대는 기원전 1039년 - 기원전 991년이다.[2]
3. 4. 아메네모페 (기원전 1001년 ~ 기원전 992년)
'''아메넴오페'''는 기원전 1001년부터 기원전 992년까지 이집트 제21왕조의 파라오로 재위했다. 마네토는 아메넴오페가 9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기록했다.[2] 그의 무덤은 타니스에 있다.
3. 5. 대 오소르콘 (기원전 992년 ~ 기원전 986년)
대 오소르콘은 6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7]3. 6. 시아문 (기원전 986년 ~ 기원전 967년)
Netjerkheperre-setepenamun|네테르케페레 세테페남문egy Saamun|시아문egy은 기원전 986년부터 기원전 967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이다. 구약성서 사무엘기와 열왕기에 따르면,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혼란에 개입하여 가나안 도시 게젤을 점령하고 솔로몬의 왕비가 된 이집트 공주에게 지참금으로 주었다고 한다.[5] 시아문의 왕명은 여러 기념비에 남아있으며, 그는 비교적 강력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집트학자들은 카르나크 사제 연대기에 기록된 17년을 바탕으로, 마네토가 기록한 시아문의 재위 기간 9년을 19년으로 수정했다.
3. 7. 프수센네스 2세 (기원전 967년 ~ 기원전 943년)
티트케페루레 세테펜레[2]는 이집트 제21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기원전 967년부터 기원전 943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의 치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딸을 리비아 출신의 유력자이자 용병인 셰숑크[6]와 결혼시켰다. 이 결혼을 통해 셰숑크는 군 사령관으로서 세력을 확장했고, 결국 이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이집트의 왕위를 주장하며 제22왕조를 열어 제21왕조의 세력을 계승했다.
참조
[1]
서적
The Third Intermediate Period in Egypt (1100–650 BC)
Warminster: Aris & Phillips Ltd
1986
[2]
서적
考古学から見た古代オリエント史
[3]
문서
ディオスポリスマグナ
[4]
문서
バアル神
[5]
성경
古代イスラエル
[6]
성경
シシャク
[7]
문서
大オソルコン
[8]
문서
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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